천재교과서
정의석
작은 북페어에 갔다. 북페어에 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들이 많았다. 이미 사람들이 많이 다녀갔는지 부스는 품절 딱지가 붙은 책들뿐 손님 없이 한산했다. 인사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나는 여기저기 잔뜩 아는 척했다. ‘편집장님은 오늘 안 계시나요?’, ‘팬 입니다.’ 사실 나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에, 대화 시간에 반비례해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말을 더듬다가 사지도 않을 책으로 시선을 옮겨 페이지를 넘기며 오, 흐음, 와를 내뱉는 동시에 여기서 빠져나갈 타이밍을 쟀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들이 내가 디자이너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왜 물어봤을까 생각했다. 질문 순서와 내용이 기묘하게 일치했다. 네, 디자이넙니다. 정의석입니다. 아, 그렇군요. 내 이름을 듣고 나면 대화가 끝났다. 네? 뭐라구요? 라고 되묻지 않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걸 보면 정의섭 또는 전의성으로 들었을 확률이 높다. 내 이름을 영어로 또박또박 적어줘도 seok을 쎼오케이로 읽던 외국인들이 생각났다. 이름이 뭔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하루를 정리하면서 잊어버릴 내 이름을 왜 물어봤는지 계속 생각했다. 새 버스의 멀미 나는 냄새가 위장 속에서 익숙해질 때쯤 나는 접신에 성공했다. 명함이다! 인스타그램 계정 정보가 담긴 명함을 달라는 뜻이었구나. 명함이 필요하다! 깨달음의 기쁨과 동시에 나는 까닭 모르게 무척 쓸쓸해졌다.
위장 속 거북한 것이 사라지자 달달하고 시원한 게 땡겨서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나를 알릴 기회를 다음에 또 놓치지 않으려면 명함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이즈로, 어떤 서체와 질감으로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 냉장고 쇼윈도우 안의 오색찬란한 포장지 중 단연 황금색으로 빛나는(그랬을거라 확신한다) 거북이 아이스크림에 한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따끈하고 끈쩍끈적한 개똥이 지뢰밭처럼 널려 있었던 너저분한 슈퍼에서 사 먹었던 추억의 아이스크림. 토끼와 거북이 중 거북이. 한 입 깨물면 와작 소리가 나는 초콜릿 겉껍질과 그 속에 저항 없이 씹히는 달콤한 하얀색 크림.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포장지 디자인은 옛날의 그것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같았다. 지금 당장 이 아이스크림을 골라야 할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한 명씩 나와서 무용담을 발표하랬다. 어린 나이에 무용담1이 뭔지, 왜 나와서 발표시키는지, 왜 하필 점심시간이 끝나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지만 무용담 프로젝트는 시작됐다. 다음 날 1번부터 매일 한 명씩 차례대로 교탁에 서서 자신의 무용담을 뽐냈다. 다행히 중간 번호였던 나는 선구자들의 발표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야기들의 패턴을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당최 내세울만한 경험이랄까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발표 전 날에도 무용담에 걸맞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궁여지책으로 인터넷에서 읽었던 가장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글을 모두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발표날 나는 교탁에 서서 준비한 인쇄물을 읽기 시작했다. 핵폭탄이 서울 상공에서 터지면 어떻게 될까요? 핵폭탄이 서울 상공에서 터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습니다… 인터넷에서 뽑아온 글을 그대로 가져와 읽을 뿐임에도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청중들의 반응을 예상하니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결국 모두 다 죽습니다...이상입니다. 나는 그들이 이야기의 결론을 파악하지 못하게 아주 조용히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청중들은 남의 이야기를 빌려온 주제에 꼴 사납게 떨고 있는 이 화자가 너무 불쌍해서, 이 발표가 무용담이어야 했었다는 사실을 잊고 침묵했다. 반전평화와 휴머니즘에 호소하는 나의 무용담 전략은 성공했다. 뜬금없이 핵폭탄 썰을 들은 선생님은 정말 무섭네요. 다들 핵폭탄을 조심하도록 해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믿는다)
그 디자이너들에게 어필할 나만의 좋은 명함은 뭘까? 정공법은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은 동시대의 시각적 충격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니까. 달고 시원한 아이스크림과 따뜻한 개똥이 강력한 유대를 쌓듯이, 차라리 그들의 귀에 대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청각적 충격을 선사하는 편이 더 낫겠다. "...저는 내년 가을에 국현미에서 개인전을 열 사람입니다.”
1무용담(武勇談): 용감한 행위나 전투에서의 경험담
작은 북페어에 갔다. 북페어에 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들이 많았다. 이미 사람들이 많이 다녀갔는지 부스는 품절 딱지가 붙은 책들뿐 손님 없이 한산했다. 인사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나는 여기저기 잔뜩 아는 척했다. ‘편집장님은 오늘 안 계시나요?’, ‘팬 입니다.’ 사실 나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에, 대화 시간에 반비례해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말을 더듬다가 사지도 않을 책으로 시선을 옮겨 페이지를 넘기며 오, 흐음, 와를 내뱉는 동시에 여기서 빠져나갈 타이밍을 쟀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들이 내가 디자이너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왜 물어봤을까 생각했다. 질문 순서와 내용이 기묘하게 일치했다. 네, 디자이넙니다. 정의석입니다. 아, 그렇군요. 내 이름을 듣고 나면 대화가 끝났다. 네? 뭐라구요? 라고 되묻지 않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걸 보면 정의섭 또는 전의성으로 들었을 확률이 높다. 내 이름을 영어로 또박또박 적어줘도 seok을 쎼오케이로 읽던 외국인들이 생각났다. 이름이 뭔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하루를 정리하면서 잊어버릴 내 이름을 왜 물어봤는지 계속 생각했다. 새 버스의 멀미 나는 냄새가 위장 속에서 익숙해질 때쯤 나는 접신에 성공했다. 명함이다! 인스타그램 계정 정보가 담긴 명함을 달라는 뜻이었구나. 명함이 필요하다! 깨달음의 기쁨과 동시에 나는 까닭 모르게 무척 쓸쓸해졌다.
위장 속 거북한 것이 사라지자 달달하고 시원한 게 땡겨서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나를 알릴 기회를 다음에 또 놓치지 않으려면 명함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이즈로, 어떤 서체와 질감으로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 냉장고 쇼윈도우 안의 오색찬란한 포장지 중 단연 황금색으로 빛나는(그랬을거라 확신한다) 거북이 아이스크림에 한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따끈하고 끈쩍끈적한 개똥이 지뢰밭처럼 널려 있었던 너저분한 슈퍼에서 사 먹었던 추억의 아이스크림. 토끼와 거북이 중 거북이. 한 입 깨물면 와작 소리가 나는 초콜릿 겉껍질과 그 속에 저항 없이 씹히는 달콤한 하얀색 크림.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포장지 디자인은 옛날의 그것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같았다. 지금 당장 이 아이스크림을 골라야 할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한 명씩 나와서 무용담을 발표하랬다. 어린 나이에 무용담1이 뭔지, 왜 나와서 발표시키는지, 왜 하필 점심시간이 끝나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지만 무용담 프로젝트는 시작됐다. 다음 날 1번부터 매일 한 명씩 차례대로 교탁에 서서 자신의 무용담을 뽐냈다. 다행히 중간 번호였던 나는 선구자들의 발표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야기들의 패턴을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당최 내세울만한 경험이랄까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발표 전 날에도 무용담에 걸맞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궁여지책으로 인터넷에서 읽었던 가장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글을 모두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발표날 나는 교탁에 서서 준비한 인쇄물을 읽기 시작했다. 핵폭탄이 서울 상공에서 터지면 어떻게 될까요? 핵폭탄이 서울 상공에서 터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습니다… 인터넷에서 뽑아온 글을 그대로 가져와 읽을 뿐임에도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청중들의 반응을 예상하니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결국 모두 다 죽습니다...이상입니다. 나는 그들이 이야기의 결론을 파악하지 못하게 아주 조용히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청중들은 남의 이야기를 빌려온 주제에 꼴 사납게 떨고 있는 이 화자가 너무 불쌍해서, 이 발표가 무용담이어야 했었다는 사실을 잊고 침묵했다. 반전평화와 휴머니즘에 호소하는 나의 무용담 전략은 성공했다. 뜬금없이 핵폭탄 썰을 들은 선생님은 정말 무섭네요. 다들 핵폭탄을 조심하도록 해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믿는다)
그 디자이너들에게 어필할 나만의 좋은 명함은 뭘까? 정공법은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은 동시대의 시각적 충격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니까. 달고 시원한 아이스크림과 따뜻한 개똥이 강력한 유대를 쌓듯이, 차라리 그들의 귀에 대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청각적 충격을 선사하는 편이 더 낫겠다. "...저는 내년 가을에 국현미에서 개인전을 열 사람입니다.”
1 무용담(武勇談): 용감한 행위나 전투에서의 경험담
천재교과서
정의석
작은 북페어에 갔다. 북페어에 내가 좋아하는 디자이너들이 많았다. 이미 사람들이 많이 다녀갔는지 부스는 품절 딱지가 붙은 책들뿐 손님 없이 한산했다. 인사라도 해야 할 것만 같아서 나는 여기저기 잔뜩 아는 척했다. ‘편집장님은 오늘 안 계시나요?’, ‘팬 입니다.’ 사실 나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에, 대화 시간에 반비례해 목소리는 기어들어 갔다. 말을 더듬다가 사지도 않을 책으로 시선을 옮겨 페이지를 넘기며 오, 흐음, 와를 내뱉는 동시에 여기서 빠져나갈 타이밍을 쟀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들이 내가 디자이너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왜 물어봤을까 생각했다. 질문 순서와 내용이 기묘하게 일치했다. 네, 디자이넙니다. 정의석입니다. 아, 그렇군요. 내 이름을 듣고 나면 대화가 끝났다. 네? 뭐라구요? 라고 되묻지 않고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 걸 보면 정의섭 또는 전의성으로 들었을 확률이 높다. 내 이름을 영어로 또박또박 적어줘도 seok을 쎼오케이로 읽던 외국인들이 생각났다. 이름이 뭔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하루를 정리하면서 잊어버릴 내 이름을 왜 물어봤는지 계속 생각했다. 새 버스의 멀미 나는 냄새가 위장 속에서 익숙해질 때쯤 나는 접신에 성공했다. 명함이다! 인스타그램 계정 정보가 담긴 명함을 달라는 뜻이었구나. 명함이 필요하다! 깨달음의 기쁨과 동시에 나는 까닭 모르게 무척 쓸쓸해졌다.
위장 속 거북한 것이 사라지자 달달하고 시원한 게 땡겨서 아이스크림 가게로 갔다. 나를 알릴 기회를 다음에 또 놓치지 않으려면 명함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이즈로, 어떤 서체와 질감으로 만들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다 냉장고 쇼윈도우 안의 오색찬란한 포장지 중 단연 황금색으로 빛나는(그랬을거라 확신한다) 거북이 아이스크림에 한 눈에 들어왔다. 어릴 적 따끈하고 끈쩍끈적한 개똥이 지뢰밭처럼 널려 있었던 너저분한 슈퍼에서 사 먹었던 추억의 아이스크림. 토끼와 거북이 중 거북이. 한 입 깨물면 와작 소리가 나는 초콜릿 겉껍질과 그 속에 저항 없이 씹히는 달콤한 하얀색 크림. 지금 내 눈에 들어오는 포장지 디자인은 옛날의 그것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같았다. 지금 당장 이 아이스크림을 골라야 할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은 종례 시간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면 한 명씩 나와서 무용담을 발표하랬다. 어린 나이에 무용담1이 뭔지, 왜 나와서 발표시키는지, 왜 하필 점심시간이 끝나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였지만 무용담 프로젝트는 시작됐다. 다음 날 1번부터 매일 한 명씩 차례대로 교탁에 서서 자신의 무용담을 뽐냈다. 다행히 중간 번호였던 나는 선구자들의 발표에 주목했다. 그러나 이야기들의 패턴을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당최 내세울만한 경험이랄까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발표 전 날에도 무용담에 걸맞는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서 나는 궁여지책으로 인터넷에서 읽었던 가장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글을 모두에게 들려주기로 했다. 발표날 나는 교탁에 서서 준비한 인쇄물을 읽기 시작했다. 핵폭탄이 서울 상공에서 터지면 어떻게 될까요? 핵폭탄이 서울 상공에서 터진다고 생각해 봅시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습니다… 인터넷에서 뽑아온 글을 그대로 가져와 읽을 뿐임에도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청중들의 반응을 예상하니 너무 무서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결국 모두 다 죽습니다...이상입니다. 나는 그들이 이야기의 결론을 파악하지 못하게 아주 조용히 이야기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갔다. 청중들은 남의 이야기를 빌려온 주제에 꼴 사납게 떨고 있는 이 화자가 너무 불쌍해서, 이 발표가 무용담이어야 했었다는 사실을 잊고 침묵했다. 반전평화와 휴머니즘에 호소하는 나의 무용담 전략은 성공했다. 뜬금없이 핵폭탄 썰을 들은 선생님은 정말 무섭네요. 다들 핵폭탄을 조심하도록 해요.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믿는다)
그 디자이너들에게 어필할 나만의 좋은 명함은 뭘까? 정공법은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들은 동시대의 시각적 충격을 담당하는 사람들이니까. 달고 시원한 아이스크림과 따뜻한 개똥이 강력한 유대를 쌓듯이, 차라리 그들의 귀에 대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청각적 충격을 선사하는 편이 더 낫겠다. "...저는 내년 가을에 국현미에서 개인전을 열 사람입니다.”
1 무용담(武勇談): 용감한 행위나 전투에서의 경험담
천재교과서
정의석